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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베를린의 밤 (The Serpent's Egg)
자살로 위장된 의문의 연속사건!!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마음을 대변한 불후의 작품!!
<외침과 속삭임><화니와 알렉산더>의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섬세한 연출!!
스웨덴의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탈세 혐의를 피해 고국을 떠나 있던 시기에 만든 작품이다. 베를린의 밤’ 등 잉그마르 베르히만 영화의 영원한 주인공이자 페미니즘 영화 ‘불륜’의 감독이며 올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을 지내기도 한 리브 울먼과 같이 한 작품이다 탈세 혐의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데 모욕을 느낀 베르히만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것에 병적으로 몰두하게 되고 주인공 아벨의 심리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영화 속 뒤숭숭한 독일의 분위기가 감독 자신이 느끼는 심정을 대변 하는 게 아닐까도 싶다.
그리고 아벨역은 로버트 레드포드, 리차드 해리스, 더스틴 호프만에게 맡아 달라고 베르히만이 제의를 했지만 모두에게 거절을 당하고 결국 데이빗 캐러딘에게 돌아가기도 했다 .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영화의 실패가 뻔히 보였지만 베르히만의 아집과 고집으로 끝까지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독 : 잉그마르 베르히만
출연 : 데이비드 캐러딘, 리브 울만, 하인츠 베넨트, 크리스티안 베르켈
제품사양
더빙 : 영어
자막 :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오디오 : DD 2.0
화면비율 : 1.66:1 Anamorphic Widescreen
지역코드 : All. NTSC
상영시간 : 119분
관람등급 : 18세이용가
제작년도 : 1977
줄거리
감독/ 배우소개
- 잉그마르 베르히만 (Ingmar Bergman)
"나는 그 거대한 평원에 서 있는 대사원의 예술가가 되고 싶다. 돌을 쪼아 용의 머리, 천사, 악마 혹은 성자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대사원의 집단 건물 속에 들어가 내 역할을 다 하고 싶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현재 생존해 있는 영화 예술가(!)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감독 중 한 명인 잉그마르 베르히만(Ernst Ingmar Bergman) 감독은, 영화를 한 사람의 내면과 정신세계, 그리고 철학을 표현하는 예술로 다룬, 그리고 영화 제작에 있어 거의 완전하게 개인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감독들 중 한 사람이다. 베르히만 감독은 1918년 7월 14일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엄격한 루터교 목사였고, 후에 스웨덴 왕실의 궁정 목사가 된다. 베르히만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매우 엄격하게 자라났다고 한다. 아버지 도덕적 원칙에 거스르는 일을 한 경우 그는 옷장 안에 몇시간 동안이나 갇혀 있어야 했고, 어린 베르히만은 이런 엄격함에 의해 많은 정신적인 상처를 입었다. 이런 경험은 이후에 그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이어지는 염세적인 분위기와 선과 악의 대결, 인간의 고립 등의 주제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5살때 연극을 접했고, 9살 때는 이미 자신의 놀이방의 책상 밑에서 혼자서 인형극을 공연할 정도로 연극에 빠졌다. 스톡홀름 대학(University of Stockholm)에서 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그는 연극 극단에서 연출과 배우로서 활동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다수의 희곡, 소설, 단편 소설을 썼지만 발표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41년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 일을 시작한 그는, 44년 자신이 감독한 첫 영화 [고통 (Hets)]을 만들었고, 이 영화로 그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베르히만의 초기작품들(55년 작 [한 여름밤의 미소(Sommarnattens Leende)]이전 작품들)은 대부분 스웨덴 젊은 세대가 겪는 좌절과 스웨덴 사회내의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들은 그 자체로는 그리 중요한 작품들은 아니지만, 이후 그의 작품이 가지게 되는 예술적/철학적 특징을 얼마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초기작들 중 49년에 발표한 [감옥(Fangelse)]은 베르히만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은 최초의 작품으로서,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으로서 인정을 받게 된다. 젊은 창녀의 자살을 다룬 이 작품에서 그는 신과 악마,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도덕적 문제에 대한 고민을 처음으로 다루게 되고, 이것은 이후 그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는 주제가 된다. 같은해 만들어진 [갈증(Torst)]은 그 이후에 만들어지는 [여름의 장난(Sommarlek)](51), [여인의 비밀(Kvinnors Vantan)](52), [꿈(Kvinnodrom)] (55)등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여 지는 또 하나의 주제인 '여성의 심리와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 중 53년에 발표된 [광대들의 밤(Gycklarnas Afton)]은 그가 철학적인 면 뿐만이 아닌 시각적인 면에서도 성숙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스웨덴 안팍 으로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던 베르히만은 55년 발표한 [한 여름밤의 미소]의 '시적 유머'로 그 해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얻어내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57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이자 영화사에 한 획을 긋는 걸작 [제 7의 봉인(Det Sjunde Inseglet)]으로 드디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영화가 던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철학적 질문, 그리고 탁월한 시각적 스타일은 유럽 예술영화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 작품을 계기로 베르히만 감독의 영화는 점점 더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개인적인 표현방법으로서의 방향을 굳히게 된다. 같은 해 발표된 그의 또 하나의 걸작 [산딸기(Smultronstallet)](동명의 국산 에로영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영화)는 한 노인의 고립감을 '여행'의 형식을 빌어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다분히 베르히만의 자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이러한 경향은 이후의 수많은 '작가 영화' 감독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감독은 베르히만 뿐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의 베르히만 팬, 우디 앨런 감독). 이후 그의 작품은 고정적인 배우들과 스탭과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그의 분신 역할을 한 배우로는 군나르 비외른스트란드, 막스 폰 시도우를 들 수 있겠고, 여배우로는 비비 안데르손, 리브 울만, 잉그리드 툴린, 그의 영화적 주제를 드러내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은 맡는 촬영기사로는 군나르 피셔, 스벤 닉비스트를 들 수 있다. 이후 소위 '신의 침묵 3부작'이라고 불리우는 [거울 속에 어렴풋이...(Sasom i en Spegel)](61), [겨울빛(Nattvardsgasterna)](63), [침묵(Tystnaden)](63)에서는 그의 신학적, 상징적 특징에서 벗어나, 인간의 소외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이 세 작품중 [침묵]이 비평가와 관객 모두에게 가장 좋은 평가를 얻는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66년에 발표된 [페르소나 (Persona)]를 통해 '인간심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는 그의 오래된 주제와 성공적으로 작별을 고하게 된다. 76년은 베르히만에게 가장 가혹한 해였다. 그는 스톡홀름의 왕립 극단에서 "죽음의 춤"이라는 연극을 준비하던 중 탈세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 사건으로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그는 간신히 충격에서 회복 되었으나, 스웨덴 수상의 탄원과 스웨덴 내의 그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웨덴 내에서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기로 맹세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스웨덴을 떠난다. 76년 4월에 헐리우드를 방문한 그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 결심을 굳히고, 이내 작업에 착수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뱀의 알(Serpent's Egg)](78)은 그가 영어로 만든 첫 작품이 되었고, 계속해서 같은 해에 영국-노르웨이 합작으로 [가을 소나타(Autumn Sonata)]를 발표하는데, 이 작품에는 같은 스웨덴 출신의 유명 배우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처음으로 출연한다. 그리고 그는 고국에 대한 고통어린 기억을 점차 극복해 갔다. 그 해 7월,환갑의 나이가 된 그는 2년만에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스웨덴은 노 거장의 귀환을 환영하면서 그를 스톡홀름 왕립 극단의 감독으로 재추대하고, 그의 이름을 건 영화상을 제정한다. 영화와 연극, 그리고 TV 작업을 병행하던 그는 83년, 일부 평론가로부터 그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기도 하는 [화니와 알렉산더(Fanny and Alexander)]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는 자전적인 영화로, 그가 일관되게 추구했던 인간의 영혼에 대한 탐색을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전 그의 영화들에서 보이던 비관적인 관점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따뜻한 질감과 색상의 촬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분히 부드러워져 있고, 희망적인 톤으로 변해 있다. [화니와 알렉산더]는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촬영상, 미술상, 의상상을 수상했고, 베르히만은 최우수 감독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 비평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베르히만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은퇴 선언 바로 이듬해(85) 원래 TV용으로 제작했던 [리허설이 끝난후]라는 다큐멘터리를 영화화해 극장에서 공개했고, 자신의 소설 "최선의 의도"를 영화화 하는 작업에 시나리오로 참여한다. 덴마크 출신의 감독 빌 어거스트에 의해 영화화된 [최선의 의도(The Best Intentions)]는 92년 칸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수상한다.
2003 사라방드 (Saraband)
1984 리허셜이 지난 후 (After The Rehearsal)
1982 화니와 알렉산더 (Fanny and Alexander)
1980 마리와네뜨의 생 (Aus dem Leben der Marionetten)
1978 가을 소나타 (Autumn Sonata)
1976 고독한 여심 (Face To Face)
1975 마술 피리 (Trollflojten)
1972 외침과 속삭임 (Viskningar och rop)
1969 정열 (En Passion)
1968 늑대의 시간 (Hour Of The Wolf)
1966 페르소나 (Persona)
1963 윈터 라잇 (Nattvardsgasterna)
침묵 (Tystnaden)
1961 어두운 유리를 통해 (Through a Glass Darkly)
1960 처녀의 샘 (Jungfrukallan)
악마의 눈 (Djavulens Oga)
1958 마법사 (Ansiktet)
1957 제 7의 봉인 (The Seventh Seal)
산딸기 (Smultronstallet)
1955 한 여름밤의 미소 (Smiles of a Summer Night)
1954 사랑 수업 (En Lektion Karlek)
1953 톱밥과 금속 조각 (Gycklarnas Afton)
모니카의 여름 (Sommaren med Monika)
1952 여자들의 꿈 (Kvinnors Vantan)
- 배우 : 리브 울만 (Liv Ullmann)
잉그마르 베리만의 전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리브 울만은 노르웨이 출신의 여배우이다. 1938년 기술자의 딸로 태어난 리브 울만은 태어나서부터 7살 때까지 아버지를 따라서 일본에서 생활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울만의 가족은 캐나다로 거주지를 옮겼고, 1946년이 되어서야 고향인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배우라는 직업에 호감을 가진 울만은 런던에 위치한 웨버 더글라스 아카데미에서 연기수업을 받았고, 50년대 말까지 연극무대에 섰다. <안네의 일기>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울만이 영화의 매력에 도취된 것은 거장 잉마르 베리만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1959년 이후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한 리브 울만은 1966년 베리만의 <페르소나>의 주연을 맡으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화점을 맞게 된다. 탁월한 지도자이자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반려자가 된 베리만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리브 울만은 곧 그에게 매혹된다. 오랫동안 베리만과 살면서 린 울만이라는 딸을 얻었으며 딸 린 울만은 종종 울만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베리만과 일하면서 신뢰와 사랑을 배웠다는 울만은 1971년 <에미그런트>로 뉴욕비평가협회상을 수상, 오스카상에도 노미네이트되는 등 저명한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어 베리만의 <대면>와 <가을 소나타> 등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후 울만은 1973년 <40 캐럿>이라는 영화로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이후 브로드웨이로 진출, [안나 크리스티]와 [나는 엄마를 기억해요] 등 몇 편의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한다. 다시 영화계로 돌아와 옛 명성을 되찾은 울만은 안토니 하비 감독의 <플레이어> 등에 출연하면서 80년대를 보낸다.
베리만이 가장 사랑했던 여배우 울만은 54살이 되던 1992년 영화 <소피>로 감독 데뷔한다. 이후 TV 시리즈를 포함 4편의 영화를 제작한 울만은 2000년 <페이스리스>를 들고 칸영화제에 찾아온다. 불륜을 당당하게 사랑의 한 형태로 격상시킨 작품 <페이스리스>는 이혼한 뒤에도 영화적 동지로 남아있던 베리만이 시나리오를 집필해 화제가 됐던 영화이다. 영상미와 이야기 구조, 극적 구성이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은 울만은 2001년 조디 포스터가 사임한 칸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대신 맡아 권위있는 배우로 새롭게 발돋움한다. 울만은 "나에게 영화는 음악과 같이 감성이 심연으로 도달할 수 있는 매개체다. 내가 훌륭한 영화들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며 소감을 밝힌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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